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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특별한 피아니스트

[ 피아니스트 ] 이보 포고렐리치, Ivo Pogorelich

by pianovella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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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 포고렐리치

 

 1980년, 제10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22살의 참가자 이보 포고렐리치가 결선에 진출하지 못하자,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그는 천재다"라고 강력하게 항의하며 심사위원직에서 사퇴했다. 일대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사건으로 그는 '우승자보다 유명한 탈락자' , '클래식계의 총아' , '건반위의 이단아'로 불리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독창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한 개성 있는 연주 스타일과 아이돌처럼 잘생긴 꽃미남 외모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 후 연주자로서 승승장구하던 시기에 21살 연상인 자신의 스승과 결혼하며 또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던 피아니스트, 마치 영화 같은 이 스토리의 주인공은 바로 오늘 포스팅할 천재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다.

 

정형화된 콩쿠르로 평가 불가한 천재 피아니스트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1958년 10월 20일 현재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에서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의 혼혈로 태어난 이보 포고렐리치는, 7세 때부터 음악가인 부모에게 피아노의 기초를 배우기 시작하여 보이슬라브 부치코비치 음악원에서 12살까지 수학했고,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피아니스트 예브게니 티마킨이 그의 재능을 발견하면서 러시아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졸업 후에는 헝가리 리스트 음악원(알리사 케제라제 사사)에서 수학, 실력 또한 급상승하여 78년 알렉산드로 카사그란데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 80년 6월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몬트리올 콩쿠르 우승 이후 같은 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제10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본선에 출전, 3라운드에 올랐으나 뛰어난 연주 실력에도 결선 진출에 실패했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레전드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결국 심사위원직을 내려놓으며 앞서 언급했던 '우승자보다 유명한 탈락자'로 불리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우승자는 베트남 출신의 피아니스트, 당 타이선이었다.) 쇼팽 콩쿠르 이후 같은 해 자신의 스승인 알리사 케제라제(21살 연상)와 결혼했는데, 이처럼 1980년은 여러 가지로 그에게 매우 특별한 해였다.

 

쇼팽 콩쿠르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는 1981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 데뷔, 명문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과 독점 계약(1998년까지 14장의 앨범 발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의 세계적인 관현악단들과 협연하였고, 쇼팽, 베토벤, 모차르트, 리스트 등의 곡을 녹음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1980년 제 10회 쇼팽콩쿠르 당시 우승자 '당 타이선'과 함께 있는 22살의 이보 포고렐리치.

 

익살스러운 표정의 이보 포고렐리치. 그는 꽃미남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하다.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 된 이보 포고렐리치의 '쇼팽 프렐류드' 앨범 자켓.

 

독특하고 강렬한 연주 스타일

 

 전성기의 포고렐리치는 놀라운 흡인력을 가진 연주자였다. 모든 아티큘레이션이 특별했고, 굉장한 테크닉은 물론, 상상도 못 할 만큼 풍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독특하고 강렬한 그의 연주 스타일은 기존의 관습과는 다른 독창적이고 개성 있는 해석을 보여주었고, 많은 음악팬들에게 열렬한 지지와 사랑을 받았지만, 공연에서는 종종 논란의 여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물론 청중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전문 비평가들에게는 '너무 많은 연기를 한다' '왜곡될 정도로 극단을 허용하는 연주다' 등의 평가를 받으며 호불호가 갈렸다. 평론, 기사 또한 그의 재능보다는 팝스타와 같은 인기를 누리는 그의 스타성에 중점을 둘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그의 뛰어난 테크닉과 음악성, 예술적 표현은 세계 음악계에서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그가 연주한 음반들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그는 베토벤, 쇼팽,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등 폭넓은 레퍼토리를 갖고 있다.

 

슬럼프.. 그리고 새 앨범, 내한공연

 

 성실하고 거침없이 연주활동을 이어가던 포고렐리치는 1996년 아내와 사별, 2000년에는 그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며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1년간의 연주 공백으로 그의 커리어는 결국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는데, "여기 어마어마한 재능이 비극적으로 길을 잃었다. 뭐가 잘못됐는가.(2006년,뉴욕타임스)" , "극도로 비음악적인 끔찍한 연주(2015년,가디언)" 등 오랜 공백 후 복귀한 연주 무대에 대한 비평가들의 가슴 아픈 혹평을 들어야만 했다.

2020년에는 15년 만의 내한공연(2005년 이후)을 통해 오랫동안 그를 기다린 국내팬들을 만나기도 했다. 당시 코로나19 확산으로 취소가 되는 건 아닌지 모두 우려를 모았던 공연이었다. 그는 공연에 앞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저의 과거와 현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과거의 제 모습에 익숙한 분들은 세월과 함께 진화한 부분들을 찾아낼 것이고, 제 이름과 연주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젊은 관객들은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저의 음악 세계만이 가진 다양한 매력을 만나 보실 수 있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이날 공연에서 바흐, 베토벤, 쇼팽, 라벨 등 다양한 작곡가들의 곡을 연주했는데, 예전의 악마적인 흡인력은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평이 있었지만, 특유의 설득력 있고 예술적인 연주는 여전했다는 호평 또한 받았다. 

 

 큰 아픔을 겪은 후 연주가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에도 포기하지 않고 재기를 위한 노력을 거듭한 포고렐리치는 2019년, 그의 전환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소니 클래시컬과 계약하고 24년 만에 재개한 녹음을 음반으로 발매하였다. 앨범을 내며 월드 투어에 나섰고, 다시 전 세계 클래식 팬을 향한 재기의 날갯짓을 시작했다.

 

 

개인적인 아픔을 딛고 새롭게 연주를 재개한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

 

'연주와 리코딩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그 다운 답변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수십 년 전부터 제 공연 비평 읽기를 관뒀습니다.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비평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멀리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필자는 그가 '비극적인 천재'라는 타이틀에 갇히지 않고, 상처와 아픔을 딛는 과정을 거쳐 새로운 진화의 길에 들어섰다는 누군가의 비평에 동의한다. 그의 재능은 절대 길을 잃지 않았으며 더욱 독창적인 자신만의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피아니스트 이보 포고렐리치가 여전히, 독보적인 예술성과 개성적인 연주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피아니스트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음은 틀림없고, 변함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 이보 포고렐리치의 1980년 제10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실황 연주 영상

     (쇼팽 에튀드 Op.10, No.10)

 

1980년 제10회 쇼팽 국제 콩쿠르 당시 이보 포고렐리치의 쇼팽 연습곡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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