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피아니즘의 전설, 에밀 길렐스
1916년 10월 19일, 구 소련의 오데사에서 태어난 에밀 길렐스(Emil Grigoryevich Gilels)는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피아노 음악의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는 뛰어난 예술가다. 특히 소련 출신의 피아니스트로써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와 더불어 소련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뛰어난 기교와 절제된 연주로 유명하였고, '강철의 피아니스트'라고 할 정도로 강인한 힘과 테크닉이 뛰어난 연주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보이며 일찍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던 그는, 6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1935년에 오데사 콘서바토리를 졸업한 후 모스크바 콘서바토리로 옮겨 전설적인 하인리히 네이가우스(Heinrich Neuhaus)를 사사하게 된다.(네이가우스는 쇼팽의 제자인 칼 미쿨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알렉산더 미차일로프스키의 제자이다). 네이가우스는 길렐스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그를 세심하게 지도하여, 길렐스가 기술과 감성을 모두 겸비한 연주자로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연주활동과 경력
길렐스는 1933년 17세의 나이로 제1회 소비에트 음악연맹 콘테스트(최초의 전 소련 피아노 콩쿠르. 지금의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에서 우승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후 1936년 빈 콩쿠르 2등, 1938년 브뤼셀에서 열린 이자이 국제 콩쿠르에서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이그나츠 프리드만, 발터 기제킹 등의 기라성 같은 심사위원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1등을 차지하였다. 이자이 국제 콩쿠르 우승을 통해 국제적인 무대에도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며 소련 정부의 후원 아래 여러 해외 순회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서방 세계와의 문화 교류에도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도약을 할 발판을 마련하려 했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냉전의 시작으로 인해 그 기회를 조금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전쟁 시에는 동료 피아니스트인 야코프 자크(Yakov Zak)와 듀오 리사이틀을 가지기도 했고, 1944년 프로코프예프의 소나타 8번을 초연, 연주활동을 이어가다 1948년부터 서유럽으로 여행을 갈 수 있었고, 1949년부터는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디드 코간(길렐스의 여동생과 결혼함), 첼리스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피아노 트리오를 결성하여 많은 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소비에트 시절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더불어 최고의 소비에트 음악가였던 그는, 1985년에 모스크바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질 때까지 서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고, 러시아 피아니즘의 살아있는 전설로 찬사를 받았다.
음악적 스타일과 레퍼토리
길렐스의 연주는 '강철의 피아니스트'라는 별명과 걸맞게 강인하고 격정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강력한 타건은 그의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대표하는 정체성이기도 하며, 쿠르트 마주어와 협연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그리고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매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음반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전 바흐부터 현대 프로코피예프까지 작곡가 레퍼토리가 매우 넓고, 특히 베토벤과 브람스, 바흐, 쇼팽 등의 작품에서 뛰어난 해석과 탁월한 연주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연주는 '힘'만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할 땐 협주곡과는 달리 서정적이면서도 정제되어 있는 그만의 단단한 연주를 들려주며 담백한 느낌을 준다. 길렐스는 소나타 곡의 대부분을 잠잠하게 연주하다 세기나 빠르기가 강해지는 부분에서 강력한 타건을 보여주곤 하는데, 이러한 해석은 감상자에게 있어 새로운 긴장감을 느끼게 해 준다.
이처럼, 정교한 테크닉과 깊은 감정 표현이 조화를 이룬 그의 연주는 많은 음악 팬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으며, 그가 남긴 녹음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길렐스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음반들은 현재도 레퍼런스로 남아있을 만큼 레전드 명반으로 손꼽히고 있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두 쌍두마차, 에밀 길렐스와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우정
길렐스는 에드빈 피셔의 연주 색채와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신비로운 해석을 존경했다고 한다. 물론 길렐스의 연주는 이들의 연주 스타일과는 많이 달랐는데, 그의 연주의 기저에 러시아적인 음향에 대한 강인한 믿음과 진지함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55년 미국 공연 당시, 러시아 피아니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기자들을 향해 "리히터의 연주를 들어볼 때까지 기다려달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와 에밀 길렐스. 두 사람은 당시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이자 장대한 스케일을 토대로 현대적 의미의 러시아 피아니즘이라는 단어가 보편화될 수 있는 토대를 완성한 장본인이자 서로 존경과 우정을 공유했던 동료이다. 두 연주자 사이에 몇몇 레퍼토리가 잘 겹치지 않는 이유도 선의의 경쟁 관계인 동시에 서로 존중하는 관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히터는 "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녹음하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에 "길렐스가 이미 녹음을 했기 때문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리히터가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1번과 2번을 연주하면, 길렐스는 3번을 연주했고, 리히터가 생상스의 4번을 연주하면 길렐스는 2번을, 리히터가 프로코피예프의 5번을 연주하면 길렐스는 3번을 연주하는 식으로, 상대의 레퍼토리를 존중하며 존경을 표시했다. 물론 서로 거리낌 없이 연주하는 레퍼토리도 있지만, 자신이 생각했을 때 상대가 최고 수준이라고 판단한 영역만큼은 침범하지 않았던 것이다.
길렐스와 리히터는 고전주의적 피아니즘을 현대적으로 수용한 새로운 시대의 러시아 피아니즘을 대표하는 쌍두마차였던 것이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화해를 꿈꾸며 연주자로서 헌신했던 피아니스트
길렐스는 1951년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954년에는 소련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같은 해 프랑스 파리 공연을 계기로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를 여행하며 연주회를 열어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55년의 미국 공연 역시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년에 도이치 그라모폰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32곡) 녹음을 진행하던 중 단 5곡을 남겨둔 상황에서(1,9,22,24,32번) 1985년 10월 14일, 며칠 남지 않은 69세 생일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화해를 꿈꾸며 연주자로서 헌신했던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음악적 유산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피아노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훌륭한 예시인 그의 연주와 녹음은 피아노 음악의 중요한 자료로 남아 20세기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세대를 넘어 전해지고 있으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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