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캉토로프
필자가 처음 캉토로프를 알게 된 건 2019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였다.
그는 프랑스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승했고, 전 악기부문 중 최고의 연주자에게 주어지는 그랑프리(Grand Prix)까지 수상하며 국제적으로 뜨거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콩쿠르 역사상 역대 4번째 그랑프리였다.) 사실 2019년 대회는 대회 전부터 피아노의 신동으로 불리며 유력 우승후보로서 뜨거운 관심을 받던 다른 참가자가 있었는데 바로 당시 10대였던 의 어린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였다. 캉토로프 역시 일찍이 뛰어난 재능과 실력으로 유럽에서 인정받고 있었고, 그의 아버지가 바이올리니스트 장자크 캉토로프라는 이유까지 더해져서 시선이 집중되었다.
당시 결선에서 그는 참가자들 중 유일하게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아닌 2번을 연주해서 주목을 받았다.
그 역시 원래 몇 달간 1번을 준비했는데(200번 이상 들으면서), 너무도 유명한, 세계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인 1번에 대해 "머릿속에 너무 많은 정보들이 있어 협주곡 1번에 대한 나만의 해석을 내놓기가 어려웠다"라고 말하며 1번에 비해 많이 연주되지 않는 곡인 2번의 악보를 우연히 본 후 가보지 않은 길을 탐험하는 듯한 신선한 느낌을 받아 선곡을 바꿨다고 한다. 마치 운명인 듯 캉토로프는 2번을 연주하여 프랑스 최초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가 되었고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검색하면 캉토로프의 콩쿠르 결선 영상이 가장 먼저 나올 만큼 여전히 화제가 되고 있는, 하나의 레전드 무대로 남아있다.
< 리스트의 환생 > < 피아노의 젊은 차르(러시아어로'왕') >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1997년 5월 20일, 프랑스의 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아버지(장 자크 캉토로프), 바이올리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음악원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고국 프랑스에서 5세 때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길, 부모님 모두 음악가라서 남들보다 이르게 음악을 시작했지만 어린아이들이 흔히 그렇듯 처음에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피아노 앞에 앉았고, 물론 재능은 있었지만 미디어가 호들갑 떠는 그런 신동은 아니었으며, 사실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피아노를 커리어로 삼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했을 만큼 상당히 평범하고 무난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한다. 공부에도 관심이 많았고 잘했으며, 특히 모든 것이 명료한 물리학을 좋아해서 오히려 이과 쪽이 적성에 더 맞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과계열을 목표로 입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던 그가 마지막에 피아노를 택한 이유는 파리 필하모니 홀에서 2500명이 넘는 청중 앞에서 연주를 하면서 오로지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고, 자신이 진짜 살고 싶은 순간은 음악을 통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부모님 역시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고 지켜봐 주면서 캉토로프의 결정과 선택을 기다려주었고, 음악가로서 먼저 경험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캉토로프는 자신을 향한 '피아노의 젊은 차르', ' 환생한 리스트'라는 찬사에 대해 "리스트는 낭만주의 시대의 최고의 작곡가이자 연주가라고 단언할 순 없지만 매우 중요하고 훌륭한 인물이기에 그런 찬사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감사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전 이런 찬사나 비평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요. 음악가는 음악에 좀 더 초점을 둬야 해요. 외부 사람의 시선에 초점을 두게 되면 사람들의 말이나 판단, 비평 등에 좌지우지되기가 쉬워져요. 하루는 '나는 정말 훌륭한 연주자야'라고 했다가 다음 날은 갑자기 우울해질 수도 있죠. 외부의 말보다는 음악에 정직하게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라며 연주자로서 받는 찬사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 또한 드러냈다.
2019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이야기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2019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제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세계 3대 콩쿠르라 불리는 규모 큰 이 대회에 참가한 것에 대해서 그는 '처음이자 유일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소수만 본선에 진출할 수 있는 '처음 도전해 본 규모 큰 콩쿠르'에서 매 라운드를 거치며 참가자들과도 서로 친구, 형제처럼 가까워질 수밖에 없고 같은 꿈을 품고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더욱 한배를 탄 동료 같은 느낌으로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꼭 이겨야 할 경쟁자라기보다, 연주 실력으로 우열을 가리기보다, 서로 다른 자신만의 개성으로 음악을 펼쳐 보이는 것이 궁금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차분하게 예선, 본선, 결선을 마치고 수상자 명단을 발표하는 순간에 그 자리에 없을 뻔했는데, 정식 시상식이 아니라 그냥 명단 발표인 줄 알고 모스크바 관광이나 할까 하고 있던 중에 다른 러시아 참가자들이 알려줘서 편안한 옷차림 그대로 급하게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 후회 없이 연주해서 상을 받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1등까지는 기대하지 않았고 한 4등 정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콩쿠르 참가 역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연주자로서 레퍼토리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콩쿠르를 준비했다는 캉토로프.
물론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많은 연주 기회가 주어지지만, 설령 결과가 안 좋더라도 앞으로 커리어를 쌓아 나가면 되는 거니까, 자신이 연주자로서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궁금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실력을 한 번 시험해 볼 목적이었다고 한다.(최근 임윤찬의 인터뷰와 닮아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선곡한 부분에 대해서도 2번은 청중을 한 번에 압도하는 면에서는 1번보다 덜하지만, 작품 곳곳에 엄청나게 반짝이는 순간과 신비로움이 깃들어 있고, 브람스 2번 역시 직접 선택한 만큼 정말 좋아하는 곡이라고 한다. 콩쿠르에 참가할 때도 자신의 레퍼토리에 대해 신중이 연구하고 참가한 것이다. 굉장히 겸손하면서도 성숙한 사고로 진중하게 음악에 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콩쿠르는 변화가 시작되는 시점"이라며 "그 자체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고 말했다. 콩쿠르 이후에 따르는 일종의 책임감이나 압박감 또한 분명히 있으며 워낙 유명한 음악가들을 배출한 콩쿠르이기 때문에 콩쿠르의 수준에 맞아야 한다는 심리적 책임감도 컸다고 한다. 실제로 콩쿠르 이후 그에게 수많은 연주 기회가 주어졌지만 팬데믹 직전 콩쿠르였던 탓에 무수히 취소되어 '비운의 우승자'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아쉬움이 컸겠다는 질문에 "코로나19 동안 굳이 좋은 점을 찾아보자면 새로운 레퍼토리를 충실하게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거예요. 사실 콩쿠르 이후엔 저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지 못했었거든요. 콩쿠르 이전이 어린 시절이었다면 콩쿠르 이후는 어른이 된 시절이라고 생각해요." 라며 겸손하고 성실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연주스타일과 음반, 내한공연
그의 연주는 매우 깔끔하고 굉장히 섬세하게 다듬어져 있다. 특히 현란한 테크닉과 강력한 호소력을 요구하는 리스트의 작품에서 너무 격하지 않으면서도 선명한, 전략적이면서도 부드러운 감성이 녹아있는 음악을 들려준다.
발매된 음반으로는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4번/바르톡: 랩소디/리스트: 헝가리 랩소디>,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 발라드>, <생상: 피아노 콘체르토 1번과 2번>, <리스트: 피아노 콘체르토>가 있다.
캉토로프는 최근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는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네덜란드 마스터 피아니스트 시리즈 리사이틀, 베를린 콘체르트 하우스, 필하모니 드 파리, 베르비에 페스티벌, 라 로크 당테롱 페스티벌 등에 초청받았고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파리 오케스트라, 베를린 슈타츠 카펠레,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에게 초청되어 협연자로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캉토로프는 세 번의 내한 공연으로 한국에도 매우 친숙함을 표현했는데, 첫 내한에서 리사이틀로, 두 번째 내한에서 서울 시향과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였고, 세 번째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하여 협연 무대를 가졌다. 내한 기념 인터뷰에서 작년 6월에 열린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놀라운 연주실력으로 최연소 우승하여 세계 무대가 주목한 피아니스트로 떠오른 임윤찬에 대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임윤찬의 연주를 듣고 아주 놀랐어요.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감정과 기교와 컨트롤이 가능한지 궁금했어요. 누구나 콩쿠르가 끝나면 커리어를 쌓아가게 되는데, 임윤찬이 어떤 행보를 이어 갈지 관심과 기대가 커요."라며 기대감을 표했다.
또한 그는 평소 음악뿐 아니라 한국의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영화감독 박찬욱, 봉준호, 나홍진의 영화들을 인상 깊게 여러 번 보았다고 한다.
단조로워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 꾸준함 속에서 발전하고 더 나아지는 음악가이고 싶다는 알렉산더 캉토로프.
더 많은 레퍼토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더 깊은 연주를 하며, 제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차근차근 더 나은 연주자가 되고 싶다는 그의 목표에서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면서도 깊고 성숙한 내면을 가진 진정한 젊은 거장의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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