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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특별한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

by pianovella 2022.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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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디오 아라우

 

1903년 2월 6일은 남미에 위치한 칠레의 치얀이란 도시에서 불과 다섯 살의 나이에 '제2의 모차르트'라는 호칭을 수여받은 꼬마 신동,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태어난 날이다. 지진과 메스티소의 나라, 유럽의 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칠레라는 나라에서 세계적인 음악가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안과의사였던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피아노 교사였던 어머니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글자를 익히기 전에 악보를 읽었고, 한 번들은 것을 기억해 연주할 수 있었으며 3세 무렵, 베토벤의 소나타를 배우지도 않고 암보로 연주했다고 한다. 5세 때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쇼팽의 프로그램으로 첫 공개 리사이틀을 열었을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신동이었다. 1911년, 8세 때 칠레 국가 장학생으로 가족과 함께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에서 슈테른 음악원의 저명한 교수이자 리스트의 제자였던 마르틴 크라우제에게 사사했다. 아라우의 천재성을 한눈에 알아본 그는 무보수로 아라우를 가르쳤고 리스트 악파의 테크닉, 정신세계까지 모든 것을 물려주며 아라우가 피아니스트를 넘은 한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11세 때부터 이미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브람스의 <파가니니 변주곡>등을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었던 그는 1914년 11세의 나이로 베를린에 정식으로 데뷔했다.  당시 유명 지휘자들이었던 니키쉬, 무크, 멩겔베르크, 푸르트벵글러에게 그 천재성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주 협연했고 순식간에 독일 내에서 유명해졌다. 1918년에 스승 크라우제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독학만으로 피아노 공부를 이어갔고 1924년 미국에 건너가 활약하다 1927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며 한층 더 국제적인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국제 콩쿠르 우승 이후 꾸준히 상승세를 타던 그는 1925년, 22세의 나이로 모교 슈테른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되었고, 1930년대부터 리코딩 활동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투어 피아니스트의 삶을 살게 되었다. 1940년대 나치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다시 유럽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연주 스타일과 레퍼토리

 

아라우의 연주는 아름답고 성실하다. 투명하고 영롱한 음색과 자연스러운 프레이징, 작곡가의 의도에 충실한 정확한 피아니즘은 유려하고 단아하면서도 청초하다. 뛰어난 기교를 바탕으로 지적이고 개성 있는 연주를 들려주었던 그는 음악을 끝없이 탐구하고 분석하여 예술의 본질을 꿰뚫은 창조적인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을 연주자의 사명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라이브 리코딩보다 스튜디오 리코딩을 선호했는데 1960년대 이후 필립스 레이블의 전속 아티스트로서 방대한 레퍼토리를 음반으로 남겼고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리스트, 슈베르트, 브람스를 비롯한 고전부터 낭만주의 시대의 레퍼토리를 모두 섭렵하며 어마어마한 기록을 음반으로 남겼다. 또 유럽의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현대 중남미의 음악 작품도 즐겨 소개하며 자주 연주하였다. 훌륭한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리스트 작품에 탁월한 해석과 연주를 보여주었는데 그 안에서 풍부한 낭만성도 충분히 표현했기 때문에 그의 초절기교 연습곡 음반은 음악사에서 명반으로 꼽힌다.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계승자

 

아라우는 유럽에만 국한하지 않고 미국, 러시아, 멕시코, 한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연주 여행을 즐겼다. 

1987년 호암 아트홀에서 열렸던 내한공연 인터뷰에서 그는 "연주는 나의 사명으로 평생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에게 연주는 힘이 아니라 기술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으며 당시 84세의 고령임에도 안정적인 연주로 연 60회 이상의 공연을 가질 정도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청중들을 매우 아꼈던 그는 각 나라의 도시마다 청중들의 반응과 분위기에 민감했는데 특히 한국과 멕시코, 러시아의 청중에 잠재되어 있는 음악적 가치에 대한 호기심과 존경심에 놀라움을 표하곤 했다. 

아라우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루돌프 제르킨과 더불어 1903년생 3대 피아니스트로 불리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계승자 호로비츠와 현대 독일적 구조주의자로 칭송받는 제르킨과 비교하자면, 아라우는 리스트로부터 비롯한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88세가 되던 1991년, 유럽 연주여행 중이던 아라우가 오스트리아의 뮈르츠슐라크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베토벤-체르니-리스트-크라우제-아라우로 이어져 내려왔던 독일 낭만주의 피아니즘의 위대한 전통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전설, 신화로 남게 되었다.

자연과 음악을 사랑했으며 진정한 의미의 인본주의자였던 그의 예술은 많은 피아니스트들과 청중들에게 존경받으며 귀감이 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해에 로베르트 슈만 협회에서는 그를 기리며 '아라우 메달'을 제정하였다. 이 메달은 그의 후대를 이은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인 안드라스 쉬프, 마르타 아르헤리치, 머레이 페라이어에게 수여되었다. 또한 그의 고향 칠레에는 '아라우 스트리트'가 있을 만큼 여전히 전 국민이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고 있다. 인종과 국경을 넘어 전 세계 클래식 팬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진심으로 전했던 클라우디오 아라우. 그는 모두에게 찬사와 존경을 받는 20세기 위대한,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진정한 예술가이다.

 

20세기 위대한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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