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겐 너무 특별한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Nikolai Lugansky

by pianovella 2022. 9. 13.
반응형

니콜라이 루간스키

 

<내겐 너무 특별한 피아니스트> 첫 번째 포스팅의 주인공은 러시아 태생의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Nikolai Lugansky)이다.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수, 라흐마니노프의 화신, 피아노의 성직자'라 불리는 그는 현존하는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으로 세계의 클래식 팬들, 그리고 피아노 전공자들에게는 테크닉부터 음악적 해석까지 부족한 게 없는, 한 마디로 다 잘하는.. 올라운더로 알려져 있다. 특히, 러시아 레퍼토리에서 느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파워력과 몰입감, 탄탄함, 정석적이고 깔끔한 그의 연주는 '믿고 듣는 루간스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묵직한 신뢰감을 준다. 

 

니콜라이 루간스키는 1972년 4월 26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7살 때 모스크바 중앙 음악학교에 진학하여 타티아나 케스트너에게 배웠고 이후 바흐의 해석으로 유명했던 최고의 여성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를 9년 동안 사사했다. 그는 스승 니콜라예바와 함께 음악을 듣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녀의 음악성과 정신성으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았다.  

 

1988년, 전 연방 콩쿠르 1위를 시작으로 제8회 바흐 국제 콩쿠르 은메달, 2년 후에 라흐마니노프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하였으나 1993년 여름, 사고로 발과 등에 부상을 입은 그는 몇 달 동안 피아노를 칠 수 없어 슬럼프를 겪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11월, 스승이자 은인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주 중에 타계했다(그녀는 죽기 전에 가진 인터뷰에서 '루간스키는 위대한 러시아 피아니즘의 전통을 잇는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단언했고 실제로 루간스키는 현재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에밀 길렐스, 미하일 플레트뇨프, 보리스 베레조프스키로 이어지는 러시아 악파,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통 계보를 잇고 있는 뛰어난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 힘든 시기에 루간스키는 1994년 여름에 열리는 제10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 참가하기로 결정하게 되는데, 오히려 이 큰 콩쿠르를 준비하는 것이 자신을 다시 좋은 컨디션으로 만들 수 있도록 채찍질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다른 각오와 성실한 자세로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 이 대회에서 루간스키는 1위 없는 2위로 입상하며 본격적으로 세계 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 러시아의 일간지는 루간스키의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파이널 라운드 연주에 대해, "이는 마치 일사병에 쓰러지는 듯한 음악적인 충격이었다. 아무도 이 금욕적이고도 문학적인 듯한 겉모습을 가진 점잖은 젊은이의 내면에 영감 넘치고 단호한 통제력을 갖춘 화산과도 같은 폭발력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라고 썼다.

얼마나 훌륭한 연주였을지 글에서도 역력히 보이는데. 왜, 1위 없는 2위인 걸까. 혹자는 당시 불과 22세였던 그가 젊은 나이에 비해 이미 다듬어진 듯한, 절제미와 균형감까지 유지하며 너무 담백하게 연주했다는 이유로 1위 없는 2위를 수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누군가에겐 '단호한 통제력을 갖춘 화산과도 같은 폭발력 있는 연주'가 또 다른 누군가에겐 '너무 절제되어 있어서, 담백해서 우승하기엔 부족한 연주'가 되는 것이다. 콩쿠르는 어쩔 수 없이 여러 심사위원들의 주관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결과를 예상하기도, 때로는 결과를 이해하기도 힘든 것 같다.

 

필자에게도 제10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는 잊을 수 없는 대회다. 

선화예술중학교 1학년 재학 시절, 시창. 청음 수업시간에 피아노를 전공하셨던 청음 선생님께서 러시아에서 직접 녹화해 오신 콩쿠르 실황 비디오를 보여주셨다. 지금은 유튜브 등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국제 콩쿠르 중계를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서, 쉽게 접할 수 있지만(정말 행복하다), 28년 전 당시만 해도 다른 나라에서 열리는 국제 콩쿠르를 국내에서 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당연히 화질은 좋지 않았지만 이 짧은 영상은(아마 본선 1라운드였던 것 같다) 예술중학교에 입학해 음악전공자 타이틀을 갓 달게 된 우리에겐 한마디로 '신세계'였다. 

 

선생님께서는 루간스키의 연주 영상만을 짧게 보여주셨는데 아마 참가자들 중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얀 피부에 마른 체형, 금발이었던 영상 속의 루간스키는 쇼팽 에튀드 작품 23의 11번인 <겨울바람>을 연주했다. 너무 하얘서 창백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꼿꼿이 허리를 세운 채 도도한 표정(당시 14살의 내 눈에 비친 모습^^)으로 어려운 패시지를 템포 한 번 바꾸지 않고 냉정하리만큼 완벽하게 치는 모습에 난 '충격'을 받았다.

<겨울바람>그 자체였다. 춥고, 매섭고, 날카롭게.. 무서운 속도로 휘몰아친 후 사라졌다. 정확하고 강력한 타건과 타건속도, 또렷한 음색은 우리의 마음을 단숨에 빼앗아갔고 음악실에 정적이 흘렀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치지??" 흔히 말하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바른 자세로 단 한 번도 무리하는 느낌 없이 가볍게 연주하는데 포르테는 시원했고 포르테시모는 천둥번개처럼 표현된다는 것이, 너무너무 신기했다.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에서 나오는 파워는 내게 상상을 초월할만큼의 반전이었다.

그날 보고 들은 루간스키 스타일, 러시아 스타일의 피아노 연주법과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는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내게 전문 연주자에 대한 생각을 아주 구체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세계적인 무대를 보며 목표는 더욱 명확해졌다. 나의 꿈은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참가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같은 대회에서 우리나라 '백혜선'피아니스트께서 3위에 입상하셨다! 백혜선 님의 포스팅 때 자세히 다루겠다.^^)

 

그 해 겨울, 세종 문화 회관에서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입상자 내한 연주회가 열렸다. 루간스키의 무대를 실제로 보다니.. 함께 간 예중 친구와 나는 감격스러워서 손을 꼭 잡고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감상했던 것 같다. 연주가 끝난 후 관객들이 그의 사인을 받기 위해 공연장 밖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본 친구가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한참 줄 서서 기다려도 사인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지하철 끊기기 전에 우린 무대 뒤로 가보자!"  똑똑한 내 친구. 분명히 아직 무대 뒤에 있을 거라는 친구의 말에 어리바리하고 있는 사이 친구는 내 손을 이끌고 거침없이 비어있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무모하고 용감했다^^;). 그가 걸어 나왔던 곳으로 가보니 무대 뒤편에서 음향 장비들을 정리 중이던 스태프들 사이로 루간스키가 보였다. 연주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한 스탭과 이야기 중이었는데 교복을 입은 우리가 우물쭈물 서성이고 있자 그가 먼저 다가와 우리 손에 들려있던 팸플릿을 가리켰다. 그리고 두구두구.. 사인을 받았다! 너무 떨려서 차마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고 사인을 하는 그의 섬섬옥수와 다소 튀었던 셔츠 컬러가 기억난다(보라색 바탕에 조금 난해한 무늬였던 것 같다^^).

그날의 콘서트는 28년이 흐른 지금도 당시의 작은 감정 하나하나가 또렷이 기억나서 미소를 감출 수 없는.. 필자에겐 정말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1년 후, 예중 2학년 때 필자는 학교에서 좋은 기회가 생겨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마스터클래스를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러시아의 음악교육에 더욱 푹 빠져버려 그로부터 또 1년 뒤, 러시아로 유학을 떠났다.)

 

사실 세계 유수의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반짝 스타가 되었다가 그 실력을 유지하지 못한 채 음악계에서 사라지는 연주자들도 많은데 나의 첫 우상 피아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루간스키는 성실하게 꾸준히 자신만의 템포로 너무나도 훌륭하게 세계 거장의 대열에 합류하였다(팬으로서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젊은 나이에 일류 피아니스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그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러한 그의 반듯하고 성실한 자세와 음악에 대한 진중함, 그리고 그의 인터뷰들에서 느껴지는 '지혜로움'인 것 같다.

 

루간스키는 러시아 작품과 후기 낭만파 작품(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예프, 쇼팽, 드뷔시 등)의 해석이 무척 탁월한 거장이다. 그의 연주에서는 파워풀한 기교, 우아함과 품위가 공존하며 견고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기교의 완벽함에도 차갑게 느껴지지 않고 묵직하고 단단하면서도 섬세하고 진중한 음악적 해석이 마음을 깊게 울린다.

필자는 루간스키의 연주를  '완벽한 나비 한 마리의 연주 같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유려한데 뽐내지 않는, 무늬가 아주 선명하고 고귀한, 잘생긴 나비.

 

그는 세계의 유명 극장과 페스티벌에서 수많은 공연을 하며 러시아적 전통을 국제무대에서 재현하고 있고 리카르도 샤이, 발레리 게르기예프, 파보 예르비, 쿠르트 마주어, 미하일 플레트네프, 유리 테미르카노프 등 현대 지휘계를 이끌어가는 위대한 거장들과 함께 협연했다. 유럽, 일본, 북미, 남미 등에서 콘서트, 리사이틀, 실내악 등 관객과 비평가 모두에게 찬사를 얻고 있는 연주자이다.

 

루간스키의 리코딩들은 탁월한 예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물이다. 워너 클래식에서 녹음한 음반들로 2000년 쇼팽 <Etudes/연습곡> 전곡 녹음으로 올해의 디아파종상을 비롯하여 2002년까지 디아파종상을 세 차례 연속 수상했고 쇼크(CHOC)상, 독일 음반 비평가상(2003), 에코 클래식상(2005)등 음반계의 주요상을 수상하며 명실공히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특히 2000년 그의 쇼팽 <Etudes/연습곡> 전곡 음반은 올해의 디아파종 황금상을 수상한 역작이며 2001년에는 라흐마니노프 <Prelude/전주곡>으로, 2002년에는 쇼팽의 <Prelude/전주곡> 녹음으로 3년 연속으로 황금 디아파종상을 수상한 최초의 피아니스트로 발돋움하게 하는 계기가 된 음반이다.

(루간스키를 비롯한 다른 연주자들의 쇼팽의 <Etudes/연습곡> 음반에 대한 분석과 리뷰는 준비 중인 '음반 리뷰' 카테고리에서 후에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

그는 현재 아내, 두 아이와 함께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여전히 세계 각국에서 활발히 연주활동을 이어가며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후진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필자의 오늘 아침 첫 감상곡은 그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이었다. 연주에서 고스란히 느껴지는 도전과 성실함, 완벽함에 또다시 감탄하고 감동하며 그의 다음 내한 연주를 꼭 공연장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고대해 본다.

 

 

 

니콜라이 루간스키와 그의 스승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