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겐 너무 특별한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ur Rubinstein

by pianovella 2022. 10. 9.
반응형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20세기 피아니스트 중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함께 최고의 연주자로 꼽히는 대표적인 거장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은 폴란드 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이다. 1887년 1월 28일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교에 있는 로지에서 당시 러시아 치하에 있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4세 때 공개 석상에서 연주했으며, 10세 때 부모님과 떨어져 홀로 독일 베를린으로 유학하여 명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의 추천으로 리스트 문하의 명 교수 칼 바르트에게 사사했다. 그는 1905년 파데레프스키의 연주를 들은 후 스승 바르트에게서 떠나 파리로 옮겼는데 그 이유는 바르트의 엄격주의적인 예술보다 자유분방한 낭만적 예술에 더 끌렸기 때문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가진 75회에 가까운 연주회에서 그는 다소 과장된 템포와 표정을 보여주며 주관적인 연주를 하기 시작했는데 일반 청중들은 굉장히 열광했지만 비평가들에게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루빈슈타인은 자신의 약점도 잘 알고 있어서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 또한 계속했다. 주법을 차근차근 개선해 나가고, 인간적인 따뜻함과 정열을 남기면서도 절제를 강조했으며 거칠고 기교적인 음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폭발적 효과를 가진 굵은 연주'로 오늘날의 대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1916년 스페인 연주여행에서 대 성공을 거두고 1919년과 1921년에는 혹평을 받았었던 미국에서도 좋은 평을 받게 되었다. 1922년부터 1937년까지 주로 유럽에서 활약하며 50대에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명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에게 '대기만성형 피아니스트'라는 말은 정말 잘 어울린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음악성과 테크닉, 모든 면에서 세련되어 70대에는 피아니스트로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레퍼토리

 

폴란드 출신답게 평생에 걸쳐 쇼팽을 연주했고 연주의 수준 역시 매우 높았는데, 당시 쇼팽의 작품뿐만 아니라 모든 곡에서 유행했던 안이한 템포 루바토에 따르지 않고, 균형 잡힌 구조속에서 어택이나 음색에 의해서 선율을 만들어냈다.

풍부한 음량과 변화가 많은 음색을 갖춘 그는 쇼팽 외에도 고전 작품에서 근대 작품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갖고 있었으며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드뷔시, 라벨, 프랑크 등의 작품에 뛰어난 해석을 보였다.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를 포함한 러시아 음악, 스페인 음악, 근대 프랑스 음악도 주요 레퍼토리이다. 특히 그는 현대 음악가의 발굴과 홍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브라질의 빌라-로보스, 시마노프스키, 스트라빈스키 등) 그들의 피아노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고 당시에 활동하던 거의 모든 음악가가 루빈슈타인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실내악 활동도 했었는데 첼리스트 그레고리 피아티고르스키,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와 더불어 백만 불 트리오를 결성했었다. 이들과 함께 틈틈이 무대에 서고 여러 음반을 녹음했다. 하지만 이 트리오가 오래가지는 못했는데, 하이페츠와 루빈슈타인의 음악적, 그리고 개인적 불화가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되었다. 그 외에도 다른 연주자, 그룹과 퀄리티 높은 실내악 녹음을 남겼다. 많은 독주곡, 협주곡, 실내악 음반을 남겼으며 그 모든 연주가 안정되어있다.

 

연주 스타일

 

필자가 루빈슈타인의 연주를 처음 영상으로 접한 건 15살 때였다. LCD에 담긴 쇼팽의 작품 연주였는데 1980년대 리코딩이니 그가 90대의 나이에 연주한 쇼팽이었다. 그때 필자의 느낌은 '신기하다' '신비롭다' 였던 것 같다. 백발의 노신사.. 할아버지 한 분이 몸의 움직임이 거의 없이 손가락만으로 쇼팽곡의 화려한 페시지를 너무도 쉽게 연주하는 모습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감상했었다.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감고 계신 건지 건반을 내려다보고 계신 건지도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연세가 많으셨지만 그 모습이 마치 피아노 치는 도사, 천사, 신.. 같아 보였다.

보통 만년의 연주가들은 테크닉의 감소를 보이는데, 손에 무리가 없는 합리적인 운지법을 유지해왔던 루빈슈타인은 자신의 초인적인 신체능력으로 밀어붙이며 레퍼토리를 현명하게 선택해 음악적 깊이만 더해져 만년의 연주도 매우 좋다. 

평범한 손 크기에 비해 남다른 손가락 길이 비율로 12도의 범위를 무리 없이 짚을 수 있었으며 협주곡들 중에서도 최상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브람스 협주곡 2번에서는 엄청난 도약과 옥타브로 가득한 패시지를 순식간에 연주해낸다. 60세의 나이에 녹음된 쇼팽 협주곡 1번 실황 음반에서도 폭발적인 스피드와 힘, 완벽한 강약 조절을 보여준다. 그의 연주는 콘서트와 리코딩의 차이가 크지 않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꼿꼿한 자세로 선 굵은 연주를 했다. 루빈슈타인은 1976년, 콘서트 무대에서 은퇴하기까지 활발한 활동을 계속했으며 1967년에는 내한 공연도 가졌었다.

 

교양이 풍부한 지식인

 

그는 특이하게 포도주 감식가로도 알려져 있으며 지적인 호기심이 강해  9개 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하는 교양이 풍부한 지식인이었다.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한 인터뷰에서 사람으로서, 피아니스트로서, 예술가로서의 그의 인상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듯 알 수 있다.

 

"나는 한 때 루빈슈타인의 성품에 매료된 적이 있다. 루빈슈타인, 그의 주변에는 마치 햇살이 빛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가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로 그를 좋아했을 것이다. 그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나는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정말로 긍정적이었다."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