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
위대한 피아니스트
20세기 가장 위대한, 러시아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는 '거장'이나 '대가'라는 칭호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예술가이다. 현존하는 20세기의 걸출한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전설에 가깝게 회자되는 존재이며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과 바로크부터 현대에 이르는 광범위한 레퍼토리, 피아노의 음향 한계를 시험이라도 하듯 굉장한 타건력을 가진 연주자로 잘 알려져 있다. 다른 피아니스트에게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남다른 집중력과 음악 전체를 지휘하는 듯한 그의 연주는 항상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리히터는 1915년 3월 20일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은 독일인 독일계 러시아인이다. 폴란드계 독일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법을 어기고 우크라이나로 건너와 귀족 출신인 자신의 제자와 결혼했다. 유년시절의 리히터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한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의 기초 교육을 받았지만 체계적으로 배우지는 못했다고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우크라이나 귀족 출신인 리히터의 어머니 집안이 러시아(구 소련)의 숙청 대상이 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비운을 겪었다. 그래서 리히터는 부모와 떨어져서 네 살 때부터 여덟 살 때까지 고모 집에서 자라야만 했고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 부모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한다. 여덟 살 때 다시 부모와 함께 살게 되면서 피아노를 다시 시작한 그는 자유롭게 연주하는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독특하게 연주해도 잘 이해해준 어머니 덕분에 혼자서 계속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고, 독학으로 피아노 기술을 습득한 후 15살 때 오데사에서 처음 공개 연주회를 열었다. 첫 공연이 성공을 거둔 후 피아노를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는 오페라 극장에서 반주를 맡으면서 음악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유년시절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2세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하여 그와 함께 또 다른 전설로 남은 피아니스트 에밀 길렐스와 함께 당시 러시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드높았던 겐리히 네이가우스에게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리히터 외에 네이가우스의 대표적인 제자들로는 야코프 쟈크, 에밀 길렐스, 아나톨리 베데르니코프, 라두 루푸 등이 있다.)
압도적인 재능
어린 시절의 그의 천재성은 대단했다. 그가 오래도록 네이가우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스승 네이가우스가 그의 특별한 재능을 일찍이 알아보고 매우 아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이가우스는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에게 리히터를 소개했고 그는 1940년, 25세의 나이로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타나 6번을 초연했다. 25세에 불과했던 청년 피아니스트에게 이 어려운 소나타의 초연을 맡겼다는 것은 리히터가 당시 이미 완성된 피아니스트였다는 점을 증명한다. 1944년에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한 후 다음 해 열린 러시아 음악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분 1위를 수상했고 1947년 모스크바 음악원 금메달, 1950년 스탈린 상 수상 등의 경력을 쌓으면서 세계 각국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다. 1960년, 45세 때 미국 무대에도 데뷔하게 되면서 그 전설은 더욱 확고해졌다. 미국의 비평가들은 "이제껏 만난 연주자들 중 가장 빼어난 피아니스트" "오케스트라 전체와 맞먹는 소리" "연주곡에 대한 경이적인 통제력"이라 말하며 그를 절찬했다.
집중력이 높고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그의 연주는 단순히 테크닉만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는 넓은 레퍼토리 안에 있는 수많은 곡들을 들으며 알 수 있다.
철저한 악보 원칙주의자
리히터는 1977년 즈음부터 암보가 아닌 악보를 펴 놓고 연주를 하며 철저한 악보 원칙주의자가 되었는데 신체노화로 인해 청각에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자기 귀에 들리는 음이 실제 음정보다 몇 도나 높게 들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음감과 무관하게 그의 기억력은 넓은 레퍼토리만큼 기인급이었는데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7번을 나흘 동안 머릿속으로 연습해서 완성했고 기억력이 지나치게 뛰어나서 그가 만난 모든 사람과 심지어 그들의 지인까지도 늘 머리에 맴도는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암보로 연주하는 암묵적인 관행을 깨고 연주회마다 페이지 터너를 동행했던 그는 공연할 때 조명을 완전히 꺼버리고 , 무대 안쪽의 작은 조명만을 살려 악보를 볼 수 있는 최소한의 조명만을 켜기를 고집했다. 그 이유는 단지 청중들이 자신의 공연을 '보러'오길 원한 것이 아니라, '들으러'오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악보를 외울 시간에 연습을 더 하겠다고 선언하며 대부분의 공연을 악보를 지참하고 연주했다.
명성
에밀 길렐스와 함께 러시아(구 소련)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가 된 그는 1961년 런던 공연 등 서구권에서 공연을 이어가면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1994년에는 한국에도 방문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가족사 때문에 서방으로의 연주 여행이 불허되었다. 이미 서방에서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하던 에밀 길렐스가 청중들에게 "저 산 넘어 제 조국 소련에는 저보다 뛰어난 리히터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그를 꼭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고, 1958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소련을 다녀온 미국의 반 클라이번이 "소련에 리히터라는 엄청난 피아니스트가 있다"라고 언론에 전하면서 리히터의 명성은 다시, 심지어 더욱 높아져 갔다.(당시 콩쿠르 심사위원이던 리히터는 클라이번에게만 10점 만점을 주고 나머지 참가자들에게는 0점을 주어 또 다른 화제를 낳았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는 러시아의 수많은 피아노 거장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리히터를 꼽았다. 그는 "다른 연주자와는 달리 그는 언제나 피아노 앞에서 정의를 실현하려고 했다" 고 말했다. 에밀 길렐즈 역시 "만약 나를 피아니스트로 생각했다면 리히터를 만날 때까지 그러한 생각을 보류하십시오.."라고, 또 반 클라이번은 "리히터의 따뜻하고 로맨틱한 연주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연주 중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를 향한 어록들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타 연주자를 압도하는 장기를 하나씩 갖고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왼손, 알프레드 코르토의 루바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엄청나게 큰 소리, 글렌 굴드의 영롱한 터치, 등. 이에 비해 리흐테르는 그 어떤 연주 스타일로도 분류되지 않는 카멜레온 같은 연주자였다." (평론가 제드 디슬러)
"세상엔 두 종류의 연주가 있습니다. 하나는 연주자가 악기로 스스로를 표출하는 수단으로 쓰는 경우입니다: 파가니니와 프란츠 리스트처럼요. 그리고 나머지는 청취자를 연주자 개인의 개성이 아닌 음악 자체에 연결해주는 경우입니다. 제 생각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보다 후자의 예시에 어울리는 연주자는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는 우리 세대에서 가장 위대한 연주자 중 하나입니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처음 그의 연주를 목격했을 때를 회상하며) 처음엔 특별하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죠.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눈물이 흐르더군요. 피아노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건 완전히 다른 악기였죠. 리히터는 지성을 갖춘 거대한 음악가입니다."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내가 경험한 가장 위대한 피아노 연주였다." (반 클라이번)
"마음에 드는 러시아인 피아니스트는 단 한 명이다: 리흐테르."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음반
리코딩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거부하지는 않았던 그의 수많은 음반이 필립스, RCA 같은 레이블로 발매되어있다. 리히터의 음악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음반으로 1994년에 나온 필립스 레이블의 <리히터 에디션>이 있다. 모두 21장으로 이루어진 이 전집은 그의 대표적인 콘서트는 물론 알려지지 않은 리코딩까지 담고 있으며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의 뛰어난 곡 해석력은 바흐의 <평균율(4CD, BMG)> 전곡 음반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그의 바흐는 따뜻하고 낭만적이며 부드럽고 서정적인 음색으로 경건하게 노래한다. 일본에서 발매된 이 음반에 대해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흐의 평균율을 모두 최고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음악가'라고 호평 받았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강력한 에너지와 완벽한 테크틱,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은 그를 피아니스트 그 이상의 거장, 시인, 그리고 철학자로 자유롭게 불려지게 했다.
말년으로 접어들수록 화려함을 더욱 기피했던 리히터는 거대한 콘서트홀보다 작고 한가한 공회당에서의 연주를 더 선호했고, 러시아나 일본의 작은 마을에서 음악을 모르는 이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며 노후를 보냈다고 한다.
그의 80회 생일 때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영감과 미에 대한 사랑의 원천"이라고 그를 칭송했다. 이제 리히터는 우리 곁에 없지만 그가 남긴 방대한 리코딩으로부터 우리는 오래도록 영감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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