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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특별한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

by pianovella 2022.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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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평범하지 않은 이 러시아 이름이 왠지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그의 이름을 제목으로 한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가 있기 때문이고, 최근 가장 주목받는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인 우리나라의 임윤찬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 파이널 라운드에서 연주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영상의 조회수가  595만 뷰를 넘기며 417만 뷰를 기록한 1978년 호로비츠의 연주 영상 조회수를 뛰어넘었다는 내용이 기사화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호로비츠는 피아니스트들에게 존경하는 연주자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전설적인 인물이며 전공자들이나 클래식 팬들에게 그저 신 적인 존재일 정도로 클래식 음악계에서는 절대적 권위의 이름이다.

 

그는 1903년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유대계 전기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연주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서 6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세르게이 타르노프스키에게 오래 사사한 후 불과 9세에 키예프 음악원에 입학하여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 사사하였고 이 시기에 그의 피아노 테크닉이나 연주 스타일이 거의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졸업 연주 때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과 리스트의 <돈 주앙의 회상>등은 키예프 음악원 역사상 처음으로 심사위원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았을 정도로 음악적 재능이 비상했다. 1923년부터 공개 연주활동을 시작했고, 그가 서유럽으로 망명할 때 그의 스승은 "너는 더 이상 배울 게 없으니 어떤 스승도 모시지 말라. 다만 굳이 찾아야겠다면 베를린에 있는 페루초 부소니를 찾아가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2년간 수십 번의 공연을 하는 동안 러시아 내전 직후의 국내 사정 때문에 공연비를 빵, 초콜릿, 버터 등으로 받으며 활동하면서도 러시아 안에서 그의 인기만큼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던 중 1925년 베를린에서 갑작스레 취소된 피아니스트 함부르크의 대타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하게 되었는데 이 연주가 대 성공을 거두며 프랑스, 이탈리아 등 본격적으로 서방 세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28년에는 미국에 데뷔하며 우상이었던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등과 만나면서 음악적으로 한층 성숙해졌고 1933년 지휘자 토스카니니와 함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를 협연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의 딸과 결혼하며 1944년, 미국에 귀화하였다.

 

독창적인 주법과 연주 스타일

 

호로비츠는 기교와 표현력 모두 균형을 잃지 않는 최고의 연주를 들려준다. 자신만의 색채를 입힌 개성 있는 연주는 '누가 들어도 이 연주는 호로비츠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독창적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독특한 손가락 주법으로 난해한 패시지를 깔끔하고 쉽게 연주하는 완벽한 테크닉',  '매우 디테일한 셈여림 조절', '천둥 같은 포르티시모' , '페달 없이도 자신만의 해석으로 여유 있게 넘어가는 기술'처럼 그의 연주는 마치 피아노를 가지고 노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심지어 극도로 어려운 부분을 그토록 쉽게 연주해 내는 그의 손 크기는 장 10도를 한 번에 짚기 어려운, 피아니스트로서는 평균 이하의 손크기를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데뷔와 동시에 전성기를 맞은 그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은 환상적인 테크닉으로 인정받았는데 특히 1940년대 초반에 녹음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연주에서 3악장 피날레 옥타브 부분은 초당 10번 꼴로 건반을 두드리는 초인적인 손목의 힘을 보여준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페달을 통해 음을 흐리는 부분을 옥타브 전체가 또박또박 선명하게 들리도록 연주해내는 것이다. 페달 사용 없이 건조한 사운드로 연주하는 그의 쇼팽 작품에서도 월등히 뛰어난 테크닉과 강렬한 음색 덕분에 호불호가 갈리는 와중에도 "호로비츠 연주" 그 자체로 들을 가치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호로비츠와 라흐마니노프

 

그는 우상이었던 라흐마니노프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모든 부분에서 깔끔하고 완벽하며 박력 있는 그의 스타일은 그가 가진 완벽한 테크닉과 조화를 이뤄 더욱 빛났다. 라흐마니노프에게까지 제대로 인정을 받아 결국 라흐마니노프가 모든 작품에 대한 편집권을 호로비츠에게 맡길 정도였다. 특히 피아노 협주곡 3번에 대하여 "내 피아노 협주곡은 바로 이렇게 연주되어야 한다고 항상 꿈꿔왔지만, 살아서 이런 연주를 들을 줄은 기대치도 않았다"며 극찬했다. 휘몰아치는 듯한 속도에 그만이 낼 수 있는 천둥 같은 포르티시모는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며 소름이 돋는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의 특징 중 하나가 1악장의 카덴차가 두 가지 버전으로 존재한다는 것인데 스피디하면서도 가벼운 느낌을 주는 오리지널 버전의 카덴차와 무겁고 크게 지나가는 화음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ossia버전의 카덴차가 그것이다. 주로 연주자들은 무거우면서도 화려한 ossia 버전을 많이 연주하는데 정작 오리지널 버전의 카덴차는 호로비츠를 비롯해 소수를 제외하면 잘 쓰이지 않았었다.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호로비츠와 같이 오리지널 버전으로 역대급 연주를 들려주며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였다.) 

 

슬럼프과 복귀, 그리고 제2의 전성기

 

활발하게 연주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과도한 일정과 우울증 때문에 1953년부터 1965년까지 12년간 잠시 은퇴하기도 했다. 연주 자체를 포기하려고 했을 만큼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중에도 RCA에서 음반 제작은 꾸준히 하고 있었고 그의 아내인 완다 호로비츠의 도움으로 카네기 홀에서 복귀를 결정하게 되었다. 복귀 무대였던 1965년 5월 카네기 홀에서 열린 리사이틀은 20세기 클래식 음악 역사에 길이 남는 공연이었다. 아내 완다의 회고에 따르면 공연 이틀 전부터 아예 매트리스를 들고 와 밤을 지새운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호로비츠는 표를 사려는 이들을 위해 도넛과 커피를 보내줬을 만큼 기다려준 팬들에게 진심을 전했다고 한다. 인터넷 예매 등이 없던 당시로서는 매우 빠른 시간인 2시간 만에 매진되어 버리며 호로비츠는 말 그대로 두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연주 역시 젊은 시절과 비교해 조금도 변함없이 유지된 테크닉과 12년의 공백 사이에 더욱 성장한 음악성으로 모두에게 절찬을 받았다.

이후 1983년 의사가 처방한 항우울제로 인해 심각한 연주상의 문제를 겪어 2년 동안 잠깐 쉬었지만 다시 화려하게 복귀에 성공했고 제자들을 양성할 나이인 80세 이후에도 꾸준히 녹음 활동을 하였다.

 

음반

 

RCA, SONY, DG(도이치 그라모폰)등 굴지의 음반사들과 계약하여 남긴 리코딩이 많다. 대표 음반으로는 토스카니니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RCA), 바비롤리의 지휘로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APR),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RCA), 카네기 홀 컴백 리사이틀(SONY), 슈만 <크라이슐레리아나>와 <어린이 정경>(SONY), 스카를라티 소나타집(SONY),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와 <메피스토 왈츠>(RCA), 호로비츠 <리디스커버드>(RCA), <호로비츠 인 모스크바>(DG), <호로비츠 인 베를린>(SONY)등 그가 남긴 모든 음반에 그의 전설적인 연주가 담겨있다.

 

피아니스트들에게 존경받는 거장 중의 거장 

 

슈라 체르카스키, 라두 루푸, 개릭 올슨 그리고 그의 제자였던 머레이 페라이어 등 당대의 유명 피아니스트들은 모두 호로비츠에게 존경을 표했다. 그의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음반 때문에 더 이상 공개석상에서 이 곡을 연주하지 않은 알프레드 코르토, 그의 라이벌로 인식되었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조차 자서전에서 자신보다 호로비츠가 더 나은 피아니스트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한 편집권을 아예 넘겨버린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까지. 호로비츠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들이 경의를 표하는 거장 중의 거장이다.

그는 1986년, 마지막 순회공연 중 61년 만에 조국인 소련에서 첫 연주를 가지게 되는데 소련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을 한 피아니스트가 다시 소련으로 돌아와 공연을 한다는 것은 미국과 소련 양국 간의 정치문제와도 연관될 만큼 많은 의미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1987년에 콘서트 연주활동을 끝낼 생각이었던 호로비츠는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 조국에서 연주회를 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 모든 부담을 감수하고 공연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 공연에서 연주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서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 필자 역시 영상으로 이 연주를 접했는데 호로비츠의 경이로운 연주도, 그 연주에 눈물 흘리는 관객들의 모습도 너무나 아름다워서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전 세계 피아니스트들로부터 무한한 찬사와 존경을 받으며,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영광을 누린 그는 독보적인 색깔로 자신만의 피아노 세계를 구축한 카리스마 넘치는 유일무이한 피아니스트임에 틀림없으며 단단하고 투명한 다이아몬드 같은 그의 연주는 영원히 전 세계에 울려 퍼지며 많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1986년,61년 만에 소련으로 돌아간 호로비츠가 연주회 도중 청중에게 손을 흔들며 밝게 웃는 모습.(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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