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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너무 특별한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

by pianovella 2022.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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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천재 음악가, 바흐 스페셜리스트

 

글렌 굴드는 작곡가 바흐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탁월한 연주를 들려주었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역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 10명을 선정할 때 항상 순위 안에 들어있을 정도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피아노의 천재였지만 매우 특이한 연주 스타일과 독특한 성격으로 평생 기인, 괴짜라 불리기도 했던 연주자이다.

1932년 캐나다의 토론토 온타리오에서 태어난 글렌 굴드는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했던 어머니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들으며 성장했다. 글을 읽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악보를 읽었을 정도로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던 그는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3세 때 이미 악보를 읽을 줄 알았으며, 5세 때 즉흥적으로 작곡을 하기도 했다. 6세 때 요제프 호프만의 연주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아 전문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고 10세가 되던 해에는 토론토의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알베르토 게레로에게 배웠다. 그는 스승 게레로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 낮은 의자에 앉아 건반과 수평이 되도록 손가락을 유지하는 방법과 손가락 끝마디의 힘만을 이용해 연주하는 주법 등 자신 특유의 피아노 테크닉을 익혔는데 후에 굴드는 인터뷰에서 "그것은 모두 나 스스로 계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1944년 12세 때부터 각종 뮤직 페스티벌과 다양한 연주 무대(오르간 연주 포함)를 가졌고 1947년에는 토론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의 전 악장을 연주하는 등 고향 무대에서 완전히 피아니스트로서의 입지를 단단히 굳히게 되었다.

고향 캐나다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워싱턴 D.C. 와 뉴욕에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리사이틀을 열었지만 음악적 변방국에 속하는 캐나다 출신의 무명 피아니스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 듯, 일부 청중 가운데 새로운 신인 피아니스트를 찾고 있었던 컬럼비아(CBS) 음반사의 책임자인 데이비드 오펜하임이 굴드의 연주에 마음을 빼앗기며 다음날 바로 굴드에게 연락해 음반사와 녹음 계약을 추진했다. 이 계약은 굴드의 인생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마침내 일주일에 걸쳐 그 유명한 <바흐:골드베르크 변주곡> 한 곡을 녹음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처음 발매한 <바흐: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고 독창적인 해석으로 바흐의 스페셜리스트, 유일무이한 해석자로 불려지게 되었다. 특히 녹음 당시 굴드의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6월의 뉴욕에 나타난 굴드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베레모에 장갑을 끼고 있었다.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면서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을 지니고 5개의 약병과, 그 유명한 의자까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때로는 지휘를 하듯 손을 내저으며 춤을 추기도 했다. CBS의 녹음 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연속 스틸 사진으로 기록되어 음반의 표지로 쓰였고, 허밍 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으며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한 이 음반은 음악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 하나가 되었다.)

 

연주활동에 대한 회의감 그리고 변화

 

1957년에는 레닌그라드(현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독주회를 열었으며 이는 세계 무대에 자신을 알리는 첫 기회였다. 굴드는 바흐와 베르크, 베토벤의 작품으로 첫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베를린으로 건너가 마에스트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협연했다. 굴드와 카라얀은 서로의 열렬한 음악적 지지자, 팬이 되었으며 이 공연으로 굴드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대중 앞에 나서기를 싫어했던 그는 어느새부턴가 연주 활동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고 점점 견디기 힘들어하다 결국 1964년 3월 시카고, 4월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연주회를 끝으로 공개 무대를 떠났다. 고향 캐나다로 돌아가 리코딩 위주의 활동에 전념하며 피아니스트에서 배우로, 철학자로, 그리고 라디오 제작자로 다양하게 삶에 변화를 주었다.(굴드는 청중과의 교감을 통한 연주보다 녹음 활동이 연주자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연에서 얻을 수 없었던 완벽함을 얻었다고 말했다.)

 

레퍼토리

 

굴드의 레퍼토리에서는 후기 고전주의나 초, 중기 낭만주의의 레퍼토리는 찾기 힘들다. 그는 바흐와 하이든, 베토벤의 작품과 같은 명료한 형식과 구성이 탄탄한, 다성음악의 미학을 주로 선호하였다. 그러나 후기 낭만주의와 현대음악을 각각 상징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등의 곡들을 레퍼토리에 포함시켰고, 논란을 불러일으킨 해석이었지만 그가 드물게 연주 한 고전, 낭만주의 음반도 발매하였다. 그가 연주한 고전시대 작곡가의 작품(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속도는 대부분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거나, 이해하기 힘든 해석으로 음악 전문가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기 일쑤였다(하지만 너무나 완벽한 테크닉과 극한의 셈여림 컨트롤, 믿을 수 없는 속주는 굴드만의 독특한 무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그의 연주는 역시 바흐의 작품이고 지금까지 있었던 어떤 해석과도 일치하지 않는 독창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해석과 굴드만이 낼 수 있는 독특한 음색으로 수많은 평론가들, 전문가들에게 바흐의 작품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는 절찬을 받았다. 필자 역시 굴드의 주된 장점은 음색 쪽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바흐와 무척 잘 어울리는 음색을 갖고 있다. 연주자마다 타고난, 고유의 음색이 있겠지만 터치와 울림 등 여러 가지 요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자신만의 음색인데 기존의 연주법들과 차별화된 테크닉, 탁월한 음악적 해석 등으로 굴드의 음색은 바흐에 최적화된 것 같다.

 

음반

 

바흐의 작품에서는 대부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대표곡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다른 음반들에서도 매우 훌륭한 연주를 들려준다.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푸가들, 토카타, 하프시코드 협주곡 1번, 그리고 베토벤 소나타 32번 등 매력 있는 연주를 들을 수 있다. 쇼팽 소나타 3번과 스크리아빈 소나타 5번 등 몇 안 되는 낭만파 작곡가의 연주 리코딩도 색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그는 사망하기 바로 전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또다시 녹음했다. 한 번 녹음했던 것을 재녹음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굴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 1981년에 발표된 두 번째 녹음에는 디지털 음을 포함, 최신 기술을 이용했고 스타인웨이가 아닌 야마하 피아노를 사용한 점이 달라진 부분이다. 1955년의 골드베르크가 바흐에 대한 새로운 해석, 신선함과 명쾌함, 빠른 속도감을 보여주었다면, 1981년의 골드베르크는 중년에 접어든 피아니스트의 여유와 한층 성숙된 예술정신을 느끼게 해 준다.

 

그의 어록

 

"만약 내가 여생을 무인도에서 보내야 한다면,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어떤 작곡가의 음악을 듣거나 연주해야 한다면, 그 작곡가는 거의 틀림없이 바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다른 어떤 음악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나를 매우 깊고 일관성 있게 감동시키고, 다소 부정확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의 모든 기술과 탁월함 그 이상의 가치 있는 것, 즉 그것은 인간애적이다."

 

"예술가는 그 자신을 위해서나 대중을 위해서도 마땅히 익명성이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그런데 난'대중'이니 '예술가'니 하는 말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자리에서 밝혀주겠다).

 

"청중을 위한 음악은 그들을 명상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녹음이 좋아요. 연주 중에 정말로 멋진 무언가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영원히 남길 수 있습니다."

 

 

그를 향한 어록

 

"몇 년 동안 음악에서 일어난 가장 위대한 일."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

 

"이렇게 아낌없이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압도적으로 드러낸 최고의 피아니스트는 없다. 아마도 충분한 시간이 충분한 사랑을 위해 노력한 어느 날 우리는 글렌의 천재성에 대한 진정한 감상에 도달할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

 

"글렌 굴드, '바흐의 가장 위대한 통역사.' 글렌 굴드는 바흐에 대한 자신만의 접근 방식을 찾았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그의 명성을 받을 만하다. 내가 보기에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바흐와 가장 잘 어울리는 음색인 음성 수준에 있는 것 같다."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

 

"그는 하나의 스타일을 창조했습니다. 그는 우리 미래가 지향하는 스타일을 보여줍니다."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는 매우 총명했다. 그의 재능은 천재적인 재능이었다. 바흐에 대한 그의 리코딩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의 뛰어난 정신력과 절대적인 식감의 명료성은 독특하다."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아쉬케나지)

 

"굴드는 음악가가 아니라 다른 작곡가들에게 찬사를 보내는 작곡가이다. 그는 바흐의 작곡에서 아무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공개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실행자의 역할은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자극하고 따라서 가장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다."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

 

"나의 위대한 영웅 중 한 명." (첼리스트 요요마)

 

"생동감 넘치는 타건과 파격적인 해석으로 고전에 새 생명을 부여한 피아니스트." (Apple MUSIC)

 

"굴드처럼 바흐를 연주하고 싶다는 철없는 마음에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지만 바흐를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굴드는 바흐가 아니라 굴드 자신을 연주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듯한 느낌. 그의 바흐는 바흐가 아니라 굴드다. 피아노 음악을 거의 모르는 사람에게도, 굴드와 다른 연주자들의 바흐를 섞어서 들려준 다음 그의 것을 분별 해내라고 하면 금방 해낼 것이다. 굴드와 동시대를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가끔 생각한다. 그의 연주를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면. 천재는 왜 다 요절하고 마는가." (피아니스트 김선욱)

 

이처럼 많은 음악의 거장들에게 특별한 의미의 피아니스트인 글렌 굴드는 1982년 50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별이 되었지만 그가 남긴 명반들과 관련 서적들을 통해 조금 더 가까이 그를 추억할 수 있음에 참 다행이라고 느끼며 '글렌 굴드'포스팅을 마친다. 

1955년에 발매 된 <바흐:골드베르크 변주곡> 앨범 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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